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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총 모치데라 지금과 옛날 관음상 2 제목

최종 갱신일 2024년 7월 9일

진하고 깊은 숲에 한 때의 안락함을 요구하여 방문하는 사람, 부처나 가람을 그린 사람, 순수한 신앙심으로부터 모토야마에 참배하는 사람, 친한 친구나 가족의 성묘를 하는 사람, 산책하는 부모와 자식, 저명인의 묘지 성묘….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생각으로 총 모치데라를 소요하고 있다.

사쿠라기 관음보살상(사쿠라기 관음)

사쿠라기 관음보살상의 사진
사쿠라기 관음보살상(정면)


일본 제일이라고 말해지는 콘크리트제 인왕문(미카도)를 빠져 나가면 좌측에 사쿠라기 관음보살상(사쿠라기 관음)가 있다.이 아름다운 브론즈상은, 1951년에 JR사쿠라기쵸역 구내에서 일어난 전철의 화재 사고의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1952년 4월 24일에 건립되었다.팔각형의 기단 위의 팔각형의 대좌에 늠으로서 서는 관음상.이 아름다운 관음상은 당시의 조각계의 권위, 아카호리 신페이의 자발적인 제의에 의해 제작되었다.또 “사쿠라기 관세음보살”의 명호와 103명의 희생자의 이름은 가마쿠라 엔카쿠지관장 아사히나 무나모토의 붓.대좌 후방의 선형의 병풍에는 희생자들의 영혼을 천공에 권하는 것처럼 락을 연주해, 손을 뻗치는 이체의 선녀상이 선각 세사레테이르.상 건립의 대표 발기인은, 당시의 도쿄 역장과 국철노조 위원장.

수중에 쇼와 30년대에 관음상의 정면에서 찍은 사진의 카피(좌상)과 올해의 여름에 약간 아래에서 바라보는 것 같은 각도로 찍은 사진이 있는(오른쪽 아래).같은 관음상일 것인데, 보는 각도, 찍는 각도에 의해, 얼굴의 표정이나 손의 위치 등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풍설에 노출되고 반세기, 사고의 희생자의 무념의 생각, 유족의 괴로움이나 슬픔을 일신에게 계속 맡아 왔기 때문인지, 그 표정에 깊은 곳이 늘어난 것처럼 느껴진다.50년 전에는 수목도 없었던 관음상 주변에 지금은 나무들이 무성하고, 배후에는 깊은 숲이 강요하고 있다.그러나, 최고의 차이는, 창건 당시의 관음상은 왼손에 보석을 얹고 있지만, 현재의 관음상의 손에 보석은 없다!?


사쿠라기 관음보살상의 사진
사쿠라기 관음보살상


관음상 건립시를 아는 사람의 이야기에 의하면, 보석에는 사고의 희생자 103명의 이름이 새겨지고 있었다다고 한다.보석이, 언제, 어떤 이유로 부처의 손에서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관음상은 팔각형의 대좌에 서 있다.팔각형은 생 유전의 근원인 우주를 나타내, 공양 탑은 사망자의 영혼을 조상할 뿐만 아니라, 남겨진 사람이나 후세에 사는 사람의 행복 그리고, 불멸되는 영혼의 재생 등, 다양한 소원이 담겨 있다고 한다.
팔각형 이트이에바, 호류사 몽전.그 몽전의 본존은 쇼토쿠 태자를 모델로 했다고 하는 국보 관음보살 입상(구세관음·그제칸논)이다.1884년에 오카쿠라덴신과 페노로사에 의해 전신을 가리고 있었던 흰 옷감이 해제해 풀어질 때까지, 오랫동안 밀교로 해져 온 구세관음도 두손으로, 모든 것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보석을 들고 있다.

사쿠라기 관음의 제작자 아카호리 신페이는, 1947년에 도쿄도 기타구의 아스카 중학교의 교장의 디자인을 의뢰받아, 아스카라는 문자로부터 아스카 시대를 연상해, 아스카 시대의 상징과도 말해야 하는 호류사의 천개에 있는 “봉황”을 연구하고 도안화했다고 한다.당연히 몽전이나 구세관음에게도 매료된 것은 상상에 어렵지 않다.불교로 나라를 수습하려고 한 쇼토쿠 태자의 일족은 모두 비명인 죽음을 이루었다.그 태자의 무념의 생각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건립된 몽전과 구세관음…….
1952년에 건립된 사쿠라기 관음과 팔각형의 대좌에는, 쇼토쿠 태자 전설과 몽전 구세관음에게 연결되는, 제작자 아카호리 신페이의 깊은 생각이 맡게 되고 있었다.사쿠라기 관음의 손에 안긴 103명의 영혼은, 50년의 세월이 지나는 가운데 다시 태어나고 새로운 생명이 되고, 지금의 시대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방광 보살(히카리칸논) 상

방광 보살상(2대째)의 사진
방광 보살상(2대째)


대주차장의 안쪽의 나무 안에서 참배자를 상냥하게 마중나가 있는 방광 관음상은 2대째이다.초대의 방광 관음상은, 1925년에 당시 제국 미술원 회원·황실기예원으로 불교미술에 조예의 깊은 조각가 신카이 다케타로에 의해 주조되었다.이 상은, 관음 신앙에 기초한 신장 33 자의 아름다운 관음상이었다고 한다.

대좌는 호류사가 일본 최고의 사원 건축인 것을 학문적으로 나타낸, 일본 최초의 건축 역사가로 헤이안 신궁이나 쓰키지혼간지 등의 설계로 알려진 이토츄타의 작품이다.
방광 관음상은, 모토야마가 노토에서 이전 후 15년 정도 지난 1925년, 모토야마로서의 사용도 갖추어진 것과, 대사업이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는 것을 감사하고 지어진 것이라고 하지만, 이토츄타 설계에 의한 대좌도 또 육도에 윤회하는 중생을 구제하는 육관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육각형의 화강암의 대좌에는 세지 보살, 관세음보살 등의 범자가 아름답게 배치되고 있다.방광 관음상에는, 관세음보살의 대자비에 의해 1923년의 관동 대지진의 희생자의 영혼도 구제 공양하는 소원도 담겨져 있던 게 아닐까 생각해진다.

방광 관음상은 류우오 연못의 부근에 서 있었다.붉게 칠함의 다리, 호상에 떠오르는 연꽃의 꽃, 후키아게대로부터의 녹풍, 수면에 이전되는 관음상은 얻어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류우오 연못의 부근은 마치 극락 정토의 풍치를 감돌게 하고 있었다고 한다.그러나, 여러 행은 무상.전쟁의 폭풍우는, 류우오 연못의 별천지에 사는 아름다운 부처까지도 빼앗아 갔다.


방광 보살상(초대)의 사진
방광 보살상(초대)


태평양 전쟁의 한창, 금속 자원의 부족에 의해 1941년에는 금속류 회수(공출)가 시작되어, 전국의 악화에 따라 철 병이나 냄비, 솥, 반지나 부젓가락, 불구, 옷장의 손잡이 그리고 절의 범종이나 위인의 동상도 총의 총알이나 병기로 모습을 바꾸어 갔다.총 모치데라에도 대범종의 공출 명령이 왔지만, 범종이 너무 너무 커 실어내는 것이 곤란했기 때문에, 그 대역으로서 류우오 연못의 부근에 서는 방광 관음상이 공출되게 되었다.
1944년의 봄, 전신을 흰 옷감으로 덮인 방광 관음상은, 승려들이 창화하는 관음경과 이별을 아까워하는 사람들의 눈물로 보류되고, 이 땅을 떠나 갔다고 한다.

쓰루미 고등 여학교의 졸업 앨범에 신카이 다케타로작의 초대 방광 관음상이 비치고 있었다.여학생들에게 지켜봐져 그리고 여학생들을 지켜보는, 향기 감도는 지반의 관음상은, 전설 니타가와누 아름다운 부처였다.

이토츄타가 제작한 육각형의 대좌는 주의 없는 공좌였지만, 1965년에 교통 안전의 소원을 담아, 닛산 자동차 가와마타 가쓰지 사장의 기부, 야마와키 마사쿠니작에 의한 2대째의 방광 관음상이 재건되었다.

2005년, 총 모치데라의 불전(대수컷 호덴), 미쓰마쓰 관, 카즈미 받침대, 시운다이, 방광당, 종루, 삼보님 등 나라의 등록 문화재에 등록된 중에 방광 관음상 대좌도 포함되어 있다.이번에 지정된 대승당도 또 이토츄타의 설계이다.또, 총 모치데라 묘지에는 아사노 소이치로나 다나카신 7의 무덤 등, 이토츄타의 작품도 많다.이토츄타 자신도 총 모치데라의, 스스로 설계한 무덤에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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