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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상 륜사의 히사시 본 씨 부부의 상
최종 갱신일 2024년 7월 9일
상 륜사
유모은부의 전설로 알려진 고마오카의 상 륜사는, 1542년(1541)량월야스쿄 거사를 원조 개기로 하는 조동종의 고찰이다.
에이로쿠 연간 시시가야 마을의 생머리 오다기리 도사 마모루에 의해 당의 처마의 수복 공사를 해, 서운 산 길상원과 칭했다.그 후, 1706년(1706) 12월 당 마을을 히사시 본 사쿄 량 연승이 령하고, 길상원을 상 륜사로 고쳐, 히사시 본 씨 보리사로 해, 연승 죽은 남편상륜거사로 당 절의 경내 흥의 개기로 했다.
이 상 륜 데라모토당 내진의 안쪽에 히사시 본가 대대것 정도 비석당이 있어, 그 중앙에 금빛의 찬인 체 하는 아미타여래상이 모셔지고 있다.그 좌우에, 각각 감실에 납입해진 히사시 본 사쿄 량 연승 부부의 상이 있다.연승의 상은 신관풍에 의관 속대를 한 것으로, 매우 간소한 모습에 보여진다.감실 중 문에 “향 보 4 기해년 7월 25일, *류드치센젠히다리쿄*드카이조쇼”라고 기록되어, 상배에는 “도 고이하 사쿄 량 와타라이 연승 공 73세 졸”이라고 있다.부인의 요와이*인의 상은 법체에게 가사를 붙인 요와이로쿠주사이젠고로 보여져, 포근한 얼굴에 품위가 갖춰져, 미모의 여성이었던 것이 알려진다.감실의 안쪽에 향보7 진넨 8월 5일, 요와이*인덴아키코**다이아네라고 있다.요와이*인은 남편 연승이 사망하면 즉시 머리카락을 깎아 내리고 불문에 들어가 아키미츠정원과 칭했다.상당한 독신자였던 것이 엿보여진다.
히사시 본 씨 부부
묘소의 연승의 석탑에 “종 고이하 사쿄 량 연승신의”라고 있으므로, 연승의 조상 이래 이세 신궁의 신관 와타라이씨를 칭하고 있었던 것으로부터 신장으로 한 것일 것이다.연승은 1660년(1660) 상속자를 따라, 1686년(1686) 상 헌원(장군망 길)의 옆 의사를 분부 붙여져, 종 고이하 미장이 량에 조닌, 이후 여행 여행의 증가에 의해 모두 2000석을 지행했다.
하타모토 히사시 본가 역대의 묘소
1720년(1720) 7월 연승 거사의 일주기에 부딪혀, 호드코시슈요와이*인에서 묘소에 이르는 조광 비탈것 도중에 신규 우물의 조성의 지시가 있어, 이 때문에 7월 5일부터 파기 시작해 같은 달 24일에 매우 성취했다.이 이코쿠트의 비용은 요와이*인으로부터의 기부에 의해 조달되었으므로, 우물을 “요와이*스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조 미쓰야마 위의 묘소에, 히사시 본 씨 최후의 영주의 무덤이 역대의 묘비의 말미에 늘어서고 세우고 있다.“성 광원님 와타라이상회거사, 메이지 30명년 8월 30일, 속명 히사시 본 상회”라고 있어, 우측면에 “아사히손 고마오카 유지자건지”라고 옛 영토민에 의한 건립의 취지를 적고 있다.메이지 유신에 의해 녹봉을 잃은 하타모토 영주의 운명에는 대체로 가혹한 것이 있던 것 같지만, 이런 상황 중에서, 옛 영토민들에 의해 이전의 영주의 유덕을 그리워해 묘탑이 지어진 것에 놀라움과, 그 경애의 정의 깊이를 읽어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슴푸레한 본당의 내진 뒤의 위패당에 놓여진 히사시 본 씨 부부의 쓸쓸한 듯한 상에도 일조의 빛이 하게 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쓰루미 역사의 모임 상담역/오쿠마 사
쓰루미구 문화 협회“학상”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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