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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자와의 위인 오오하시 신타로
최종 갱신일 2020년 11월 6일
오오하시 신타로와는
(오하시 처소 창고)
1863년(1863) 에치고 나가오카 성벽아래에 탄생.
아버지·오오하시 사헤이가 1887년(1887)에 설립한 출판사 “하쿠분칸”을 인계, 신타로가 발안한 잡지 “일본 주인 논집”이 대히트합니다.그 후에도 “태양” 등 많은 잡지에 착수해, 출판계에 한 시대를 쌓아 올립니다.
또, 사헤이는 도서관의 창설에 착수합니다만, 개관을 기다리지 않고 사망.신타로는 유지를 인계, 1902년(1902)에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립 도서관 “오하시 도서관”을 건설했습니다.당시, 일반적으로 공개되고 있었던 도서관은 적고, 대단한 성황함이었습니다.
하쿠분칸의 경영이 궤도에 올라가면, 신타로는 출판계에서 정재계에 활동의 폭을 넓힙니다.도쿄 가스(가스) 회사에서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신뢰를 얻고 이사가 되어, 거기에서 일본 강관이나 일본 우선, 제일생명 등, 50 이상의 대기업의 경영에 참여하게 됩니다.
또, 도쿄시 회의원·중의원 의원·귀족원 의원으로서 정치의 세계라도 활약했습니다.
가나자와에서의 위업
보탄엔(구스야마영웅컬렉션 가나가와 현립 가나자와분코 보관)
신타로는 풍경 명미인 가나자와가 마음에 들어, 1905년(1905)경, 칭명 데라히가시 이웃, 해안 여승방(카이간니지)의 철거지에 별장을 세웠습니다.그 후 인접지에 보탄엔을 만들어, 나가시마 저택에 심어져 있었던 모란을 옮겼습니다.전성기 무렵은 정원이 개방되어, 많은 손님이 방문했습니다.
또, 신타로는 도쿄와 지역경제를 연결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일본 제강소가 가나자와에 진출할 때, 신타로는 가나자와의 경관 보호와, 현지의 사람들을 높은 임금으로 적극적으로 고용하는 것을 실현했습니다.
가나자와분코의 재건
관동 대지진의 영향에 의해 도괴한 가나자와분코의 재건에 있어서, 1928년(1928), 가나가와현 지사 이케다 히로시는, 신타로에게 5만엔(현재의 금액으로 약 5억엔)의 기부를 의뢰했습니다.신타로는 가나가와현이 영구히 유지·보존하는 것을 조건으로, 쾌락했습니다.건설 후도 신타로는 가나자와분코를 육성시켜, 기부를 계속해, 선전했습니다.
칭명사 부흥과 지역 부흥
야스미당의 낙성된 기쁨식(사카이 노부코씨 제공)
불교의 신앙에 두꺼웠던 신타로와 스마코 부인은, 관동 대지진 등으로 황폐하고 있었던 칭명사의 본당이나 종루(쇼로우)를 부흥하기 위해, 기부하는 등 힘을 다했습니다.
또, 1935년(1935), 창립자 호조 사네토키의 660 회기를 기념하여, 경내의 가나자와 산 등 미야마에게 관세음보살을 100체 배치하고 순례 코스를 만들어, 가나자와 산의 정상에는 야스미당을 만들었습니다.
100체의 관음을 모두 순례하면 덕택이 있다고 여겨져, 관광지로서 대단한 성황을 보였습니다.
현재의 야스미당(가타오카 준이치씨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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